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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카잔 K-culture경연대회 성료, 아리랑과 부채춤 인기지난 27일(토) 러시아 타타르스탄공화국 카잔에 있는 국립종합대학인 카잔연방대학교 한국학연구소(소장 고영철 교수) 주최로, 2024년 카잔 K-culture 경연대회가 '민족우호의 집'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민족우호의집’은 러시아 연방이 각 민족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주요 도시에 건축하여 민족문화를 유지 및 진흥을 지키는 장소이다. 이번 행사에는 총 33개팀이 신청을 하여, 최종 예심에서 선정된 카잔, 모스크바, 첼랴빈스크, 나베르즈늬예첼늬, 체복사리 등에서 참가한 20팀 경연자들이 한국전통무용, 한국전통민요, K-pop, K-pop 커버댄스 부분에 개인 및 팀으로 총 20개 팀이 참가해서 뜨거운 결선을 치루었다. 이번 경연대회에서 불려진 노래와 춤은 ‘아리랑’, ‘워너비–있지’, ‘아이유-라일락’, 트와이스-'One spark', ‘ICHILLIN-La Luna’, ‘Billie-링 마이 벨’, ‘INTRO +TXT-LOSER-LOVER’, ‘Xg-Tippy toes’, ‘Le Sserafim-fearless’, ‘P1Harmony–Scared’, ‘P1harmony-doom du doom’, ‘IVE-ELEVEN, Lee Hi- ‘Breath’, ‘픽시 – 알려주세요’, ‘스트레이 키즈-라라라라’, ‘체셔(원작가-ITZY)’, ‘한국. 역사와 봄’, ‘-슈퍼 레이디, ‘지수–flower’와 한국전통무용 '손수건'이 펼쳐졌다. 특히 한국의 (사)공주아리랑보존회 남은혜 명창과, 신자유 가수가 영상을 통한 특별공연을 해주어 큰 갈채를 받았다. 남은혜 명창은 한국의 국악과 아리랑을 러시아 카잔인들에게 지도하고 널리 알려오고 있다. 2017년부터 매년 한국국악을 교육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카잔연방대학 한국어 전공 학생 연수, 카잔연방대학교 국제한국학학술대회, 카잔 K-culture대회에서 공주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특별공연으로 선사하는 재능기부를 해오고 있다. 남명창은 "한민족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러시아 동포사회와 러시아인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기회인 만큼 매년 참가하고 있다." 이어 "특히나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카잔대학교에서 매년 개최되는 한국학과 국악을 알리는 무대가 다시 재개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 행사의 심사는 심사위원장 카잔연방대 고영철 교수, 카잔연방대 한국학연구소 김영숙 연구원, 카잔연방대 가이눌리나 랴일랴 교수, 카잔 고려인협회 김루돌프 회장, 사회복지법인 유비이스 리시나 율리야 회장이 담당했다. 1등을 수상한 LALUNA는 "저희는 꽤 오랫동안 행사를 준비해왔습니다. ‘ICHILLIN-La Luna’ 커버 댄스를 매일 연습하고 연습했습니다. 우리의 길은 길고 험난했습니다. 중간에 참가자들이 바뀌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힘을 합쳐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꼭 이 곡을 '한국문화의 날'에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모두 우승을 바랐지만 실제로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년에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참가할 겁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참가자 중에는 카잔에서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채택하고 있는 18번학교의 5학년 32명이 단체로 출연하여, 한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뮤지컬 공연에서 아리랑을 선사하여 동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참가팀은 특별상을 수상했다. 특별 지도자상을 받은 카잔 18학교 5A반의 담임 교사인 ‘스마기나 이네사 발레리야노브나’는 "2023년 9월 학기에 카잔연방대 고영철 교수님으로 부터 한국어를 공부하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학부모들은 모두 만장일치로 한국어를 배우기로 동의했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한국의 한국어, 역사, 문화를 공부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축제를 열었는데, 학교 행정부에서 한국을 보여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민속예술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전통 부채춤과 K-pop을 결합하고, 공연의 휘날레는 명곡 '아리랑'이었습니다. 모든 준비는 리허설과 소품 제작에 도움을 주신 부모님들의 덕분에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한편 카잔 지역에는 2016년 9월 학기를 시작으로 현재 5학년부터 9학년(초중등학교)까지 제2외국어로 15개 학교가 한국어 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이 학생중 일부가 대학에서 한국어 전공으로 입학하고 있다. 수상팀에는 카잔연방대 총장명의의 상장과 부상이 시상되었다. 1등 수상팀에게는 45,000루블, 2등 25,000루블, 3등 20,000루블이 상금으로 지급되었다. 특별상 수상팀에게는 오리온 초코파이 1상자가 수여되었다. 한편 수상식에 이어서 경연 참가자와 전체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경품권 추첨행사에서 한국산 화장품 세트 3개와 벽시계 20개를 대상으로 행운권 추첨이 있었다. 행사를 위해 대한민국 교육부,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교육신문. CIS한국교육문화학교협의회, 모스크바 겨레일보, 모스크바 라닉스 등이 후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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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 가무악 향연국립남도국악원은 오는 23일 토요일 오후 3시, 대극장 진악당(전남 진도)에서 2024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 가·무·악 종합공연 '국악의 향연'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봄꽃이 만개하는 봄날과 어울리는 곡들을 담아 구성하였다. ‘흩은 가락’이라는 의미의 기악독주곡 형식의 산조를 서용석 명인의 가락으로 엮어 연주하는 <산조합주>를 시작으로, 유비가 관우·장비와 함께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 찾아가는 내용을 담은 판소리 적벽가 중 <삼고초려> 대목, 남도잡가 중 유명한 온갖 새가 나오는 <새타령>, 피리독주곡 <상령산풀이>까지 선보인다. 이어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양손에 부채를 들고 여러 가지 꽃과 물결 모양을 만들며 추는 <부채춤>, 보는 이로 하여금 모두를 신명 나게 하는 <김오채류 선반 설장구>, 마지막으로 박범훈의 가야금 독주곡 <새산조> 연주 위에 펼치는 국립남도국악원 무용단 이임정 단원의 무용까지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은 무료이며, 공연 전후 진도읍사무소와 국악원, 오산초등학교(고군면) 거쳐 회동(신비의 바닷길)과 국악원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또한,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 11월까지 공연 스탬프 쿠폰 이벤트를 진행하여 참여한 관람객들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한다. 공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립남도국악원 누리집(https://jindo.gugak.go.kr), 또는 전화(061-540-4042, 장악과)로 안내받을 수 있다. 한편, 2004년 개원한 국립남도국악원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해,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공연과 교육, 체험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 국민의 문화쉼터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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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립국악단 21일 정기연주회…"전통의 맥"대구시립국악단은 오는 21일 오후 7시 30분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정기연주회를 개최한다. 공연에선 봄의 시작을 알리는 대취타와 민속무용 부채춤, 판소리 흥보가, 가야금 병창 등을 선보인다. 해설은 예술감독인 한상일 상임지휘자가 진행한다. 대취타는 임금이나 귀인의 행차 때 연주되던 음악으로 태평소, 나발, 나각(소라) 등 관악기와 북, 장구 등 타악기로 구성된다. 부채춤은 화려한 장식의 부채를 들고 아름다운 모양을 구사하며 추는 경쾌한 장단의 춤이다.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춤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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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中'불꽃놀이' 훔쳐간다" 황당 주장.... "적반하장"중국의 한 언론사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5명 중 1명이 한국이 중국 전통문화인 '불꽃놀이'를 빼앗으려 한다고 답변, 논란이 커지고 있다.중국 매체 '구파신문'은 중국 정부가 1990년대부터 금지해온 춘제 불꽃놀이를 다시 허용키로 한 것과 관련, 중국 누리꾼들의 인식을 조사해 최근 보도했다. 그 결과 가장 많은 43%가 '전통 문화 보전을 위서 다시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중 '한국이 불꽃놀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해 중국의 문화를 빼앗으려 한다'는 의견이 27%를 차지했다.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4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정말 어이가 없다"며 "저는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관련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 알려왔던 터라 누구보다 세계유산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은 불꽃놀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적이 절대로 없다"고 밝혔다.서 교수는 "지난해 설 연휴 때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중국설'을 '음력설'로 훔쳐간다고 난리더니, 올해에는 불꽃놀이를 훔쳐간다고 또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며 "자신들이 먼저 한국의 김치, 한복, 부채춤, 심지어 독립운동가 국적 및 민족까지 훔치려고 하면서, 우리가 자신들의 문화를 훔치려고 한다니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고 지적했다.이어 "중국인들은 타국의 문화를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자신들의 문화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만 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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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13개국 재외동포 예술단체 초청 국악 연수국악인 양성과 전통문화 보급에 앞장서 온 국립남도국악원(원장 명현)은 재외동포 국악인 등에게 전통예술을 전수하는 '2024 해외 동포 및 국악단에 초청 연수'를 실시한다고 13일 밝혔다. 참가자들은 전라남도 진도에 소재한 국악원에서 2주간 사물놀이·부채춤·장고·민요·판소리·전통춤 등을 배우고, 전통 공연 관람과 문화 탐방을 하며 한국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들은 오는 3월부터 12월까지 10회에 나눠서 전남 진도군 소재 국악원에서 연수를 받는다. 오는 3월 11∼22일 실시하는 1차 연수에는 루마니아 세종누리소리 단원 11명, 독일 한글만세 단원 8명, 카자흐스탄 비둘기무용단 단원 10명이 참가한다. 12월까지 이어지는 연수에는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인도네시아 등 13개국에서 347명이 참가한다. 국악원 관계자는 "동포 및 현지인 등으로 구성된 국악·무용단체·동아리 등을 초청해 우리 전통예술의 해외 보존과 전승을 돕는 사업으로 국악 인프라가 취약한 곳부터 지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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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 기운 받으러 국립국악원 갑시다”국립국악원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를 맞아 설날 당일인 2월 10일(토) 15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설 공연 ‘청룡이 나르샤’를 선보인다. 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우리나라 대표 명절인 만큼 설 공연 ‘청룡이 나르샤’는 태평한 신년을 맞이하고자 하는 축원의 마음을 담았다. 이번 공연은 동서남북 네 바다를 지키는 사해용왕 중 청룡인 동해용왕에게 신명나는 우리 음악과 춤으로 새해의 무사안녕을 청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1장에서는 정악단의 보허자, 무용단의 정재 무고(舞鼓)를 통해 청룡의 위엄과 신묘한 기운을 선보인다. 2장에서는 민속악단의 성주풀이 등 명절에 어울리는 남도·경기민요와 부채춤, 재담을 통해 새해의 무사 안녕을 청하고 3장에서 판굿으로 축원을 담아 청룡의 비상을 꿈꾼다. 공연 당일에는 국립국악원 잔디마당에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체험 프로그램인 ‘우면랜드’를 개장해, 지난해의 액을 쫓는 ‘사자놀음’을 선보이고 다양한 민속놀이 부스를 설치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체험마당을 무료로 운영한다. 한편, 설 명절을 맞아 국립국악원 유튜브 채널에서는 지난해 국립국악원에서 선보인 공연들을 선보인다. ‘종묘제례악’(9일), ‘나례’(10일), ‘우면산별밤축제’(11일), ‘화이부동’(12일) 등 4작품이 연휴 기간인 2월 9일(금)부터 12일(월) 15시, 국립국악원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된다. 국립국악원 김영운 원장은 "갑진년(甲辰年) 새해, 관객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청룡이 나르샤’를 설 공연으로 마련했다.”며, "가족과 함께 공연을 즐기시며 뜻 깊은 설 명절을 보내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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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동구문화재단 2024 신년음악회대구 동구문화재단은 2024 신년음악회 '새로운 시작, 희망의 노래'를 오는 26일 오후 7시30분 아양아트센터 아양홀에서 연다.이번 신년음악회는 영남국악관현악단(지휘 김현호)과 소리꾼 장사익, 바리톤 고성현, 테너 하석배, 노리광대, 예솔무용단, 민요 가수가 함께 협연한다. 전통민요, 성악, 민요, 부채춤, 사물놀이 등 소리와 연희 무대에서 신명 나는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첫 무대는 영남국악관현악단과 노리광대가 대북과 국악관현악의 화려한 연주로 시작한다. 이어서 예솔무용단이 '한반도아리랑'으로 춤사위를 선보이고, '우리비나리'를 국가경기민요 전승자들이 노래한다. 푸치니 국제콩쿠르 1위 수상 등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바리톤 고성현과 WFIMC 등록 세계 최고권위 국제성악콩쿠르 동양인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한 테너 하석배가 '목련화''향수' 등 우리 가곡과 가요를 들려준다. 부채춤에 이어서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장사익의 '찔레꽃' '아리랑' 등 삶의 깊이와 애환이 느껴지는 노래를 선보일 예정이다. 마지막 무대는 노리광대와 영남국악관현악단의 판굿으로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 되는 신명 나는 무대로 신년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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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한국교육원 개원 30주년 축하 기념식지난 12월 8일(금)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대강당에서 사할린한국교육원 개원 30주년을 축하하는 뜻깊은 기념식이 열렸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은 1993년 12월 10일 유즈노사할린스크 에멜야노바 거리 19-A 제21학교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2006년 12월 29일 현재의 한인문화센터로 이전해온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사할린한국교육원은 한인동포들과 러시아인들에게 꾸준히 한국어 교육을 실시해 연 7천 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다. 사할린한국교육원은, 한류 영향으로 점점 증가하고 있는 한국어 수강생들의 수요와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국어 강좌와 한국문화반 개설 및 운영뿐만 아니라 사할린국립대학교 한국어과, 동양김나지아, 제2김나지아, 제32학교, 코르사코브 제2학교와 제4 학교,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 <체부라쉬카>유치원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한글학교에도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한국어능력시험(TOPIK)을 주관하여 한국 유학이나 취업 희망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각종 정보제공, 상담, 현지 적응 도움 및 교육도 시키고 있다. 이날 기념식에는 주유즈노사할린스크영사출장소 박상태 소장,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 사할린국립대 임 엘비라 어문·역사·동양학 대학 학장, 유즈노사할린스크 시한인회장, 사할린주 한국교민회 대표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특히, 7대 사할린한국교육원장을 지낸 장원창 현 첼랴빈스크 대학교수와 이재현 현 하바롭스크교육원장이 참석하여 더욱 의미가 있었다.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학생들의 한국 전통무용 북춤으로 시작된 기념식은 귀빈들의 축사, 개원 30주년 기념 문예 콩쿠르 입상자 시상, 원로교사 권견자 선생님을 비롯한 한국어 교육 관계자들에게 감사패 전달, 정승훈 원장의 감사 인사 순서로 마무리 되었다. 행사 도중 축하 공연을 해준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 학생들(북춤/부채춤/소고&설장구춤)과 12월 1일 K-Pop 축제에서 입상한 코르사코브 제2학교 댄스팀, 코르사코브 제4학교 졸업생 브라즈노바 알료나, <체부라쉬카>유치원생들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2023년 12월15일(음력11월3일)새고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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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바이두 한복·김치에 이어 "부채춤은 중국민속무용" 역사왜곡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가 우리나라 부채춤을 중국의 민속 무용이라고 주장하자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9일 "문화 침탈"이라며 비판했다. 서 교수는 1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우리 부채춤을 한족, 하니족, 조선족 등 민족이 긴 역사를 거치며 각자 다른 특징을 형성한 중국 민간 전통무용 형식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고 지적했다. 또 "지난 5월 홍콩 고궁박물관 공식 SNS에 한복을 차려 입고 부채춤을 추는 사진을 올리고, '중국 무용'(Chinese Dance)으로 소개해 큰 논란이 됐다"며 "항의 메일을 계속 보냈지만, 아직 시정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복, 김치, 아리랑, 판소리 등에 이어 중국의 문화공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며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때"라고 덧붙였다. 지난 1954년 원로 무용가 김백봉이 첫 선을 보인 창작한 신무용 '부채춤'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군무로 공연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1992년 명작무로 지명됐으며 2014년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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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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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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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문화행사로 즐기는 풍성한 한가위 연휴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추석 연휴(28일~10월 3일) 28일부터 엿새 간 청와대에서 특별 문화행사를 선보인다고 25일 전했다. 28~30일 헬기장에서 전통놀이 체험행사와 전통 공연을 진행하고, 녹지원 앞 여민1관에 쾌적한 휴게 공간을 조성한다. 전통 놀이 체험행사는 '청와대 칭칭 나네(28~30일)'다. 누구나 참여해 투호 놀이, 떡메치기, 공기놀이 등을 즐기고 실팽이와 전통 부채를 만들 수 있다. 전통 공연은 '청와대 가을에 물들다(10월 1~3일)'이다. 가을 정취를 풍기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흥겨운 공연 한마당을 벌인다. 공연은 오전 11시와 오후 2시 하루 두 번 열리며 별도 예매없이 관람할 수 있다. 1회차 공연에선 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오북춤, 경기민요, 부채춤 등을 만나볼 수 있다. 2회 차 공연에선 조선팝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억스', 현대적 탈춤 공연단체 '천하제일탈공작소', 연희집단 '더 광대'가 하루씩 무대에 선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쾌적한 관람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여민1관에 휴게 공간도 마련한다. 휴게 시설은 물론 음수 시설, 수유실 등을 설치해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청와대 국민개방 누리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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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 앙카라 국제 문화 축제에서 K-컬쳐 매력 알려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원장 박기홍, 이하 문화원)은 지난 9월 22일 앙카라 제르모던 야외공연장에서 한국, UAE 등 55개국 대사관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2023년도 앙카라 국제 문화 축제에서 부채춤 공연, 한식 시연 및 시식 등 K-컬처의 매력을 알리는 행사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에는 곡한 야즈그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차관, 이원익 대한민국 대사, 사니 알 자히리 UAE 대사, 무함마드 하산 하비불라자데 이란 대사, 압둘하미드 함자 아랍연맹 대사 등과 500여명의 관람객이 참석했다. 야즈그 차관은 "축제는 다양한 문화의 풍부함을 하나로 모으는 플랫폼일 뿐만 아니라 우정과 협력의 상징이며 55개국 대사관이 오늘 축제에 참여했다. 올해 축제에서는 독특한 특징으로 역사를 반영하는 요리법, 춤, 패션, 음악 및 예술 분야가 우리의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하여 이곳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원익 대한민국 대사는 "지금 한국문화는 역사상 전례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K-팝, K-드라마, K-영화 K-푸드 등 다양한 K-콘텐츠가 확산되면서 한국문화가 지구촌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함께하는 것이 항상 더 좋다”라는 이번 행사 슬로건에 맞게 한국이 함께 참여하게 된 것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앙카라 국제문화 축제가 한국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나라의 멋진 문화들을 체험하고 감상할 수 있는 문화 한마당으로 지속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각 나라의 부스에는 전통 음료, 전통 의상 등 각 나라의 전통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었다. 한국의 문화부스에는 다양한 한식을 구경할 수 있는 한식 모형이 전시되었고 한복을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한복 포토존이 준비되었다. 또한 아기자기한 한글 도장으로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로 써보는 시간을 통해 방문객들은 한글로 쓰여진 자신의 이름을 보고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행사장에 마련된 무대에는 한국의 전통 부채춤 공연과 대사관저 요리사가 진행하는 김밥 만들기 시연회가 준비되었다. 한국의 전통 부채춤 공연이 시작되자 각 나라의 외교관 및 행사장 방문객들은 전통 무용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무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사관저 요리사가 진행하는 김밥 만들기 시연회에는 한식을 사랑하는 방문객들이 모여 김밥의 제작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것은 스시가 아니라 김밥입니다” 라며 김밥을 소개한 김정수 관저요리사는 이번 시연회를 통해 한국의 김밥이 더욱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마무리를 지었다. 김밥 만들기 시연회가 끝나고 한국 문화 부스에서는 실제로 김밥을 체험 할 수 있는 김밥 시식 행사가 이어졌다. 한국 부스 앞에는 관람객들이 김밥을 체험하기 위해 줄을 서며 기다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주튀르키예 한국문화원 박기홍 원장은 "55개국 대사관들과 공동으로 진행한 세계의 문화가 모이는 이 축제는 문화와 사람들을 더 잘 알아가는 기반이 될 것이다. 문화와 예술을 통한 소통과 공감으로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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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고등학교 소리누리예술단 캐나다 해외공연국립국악고등학교(교장 모정미) 소리누리예술단은 학생들의 교내외 공연활동 활성화 및 질적 발전 도모를 위해 2012년 창단하였으며 본교 1,2학년 학생들 중 우수한 자원을 엄정한 기준으로 선발하여 구성한 전통 문화예술 사절단이다. 우리나라 대표의 학생예술단체를 지향하는 본 예술단은 매년 여러 국내외연주회와 행사에 초청을 받으며 큰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의 캐나다 공연은 2018년, 2019년, 2022년에 이어 네 번째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특별히 올해는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캐나다 토론토 한인회와 주토론토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재방문 요청이 있었다. 추석 연휴와 개천절 및 한인 가을 축제 기간 동안 9월 30일(토) ‘토론토 한인회 제 3회 한인 가을 축제’ 초청 공연, 10월 1일(일) ‘토론토 메르디안 아트센터 공연’, 10월 3일(화) ‘온타리오 주의사당 국기게양식’ 초청 공연, 현지 학교 문화교류 공연을 펼쳐 캐나다 한인과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올 예정이다. 공연에 참가하는 인원은 총 35명(학생 30명, 교사 5명)으로 연주곡은 관악합주 ‘수제천’, 대취타, 한영숙 류 ‘태평무’, 독주 ‘피리산조’, 창작무용 ‘동백 아가씨’, 사물놀이, 민속무용 ‘부채춤’, 국악관현악 ‘그 마음 흘러라’, ‘가을 소곡’, ‘축제’, ‘오 캐나다, 애국가’로 전통음악과 무용을 중심으로 옛것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공연을 준비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 소리누리예술단장 모정미 교장은 "작년 캐나다 공연에서 관객들의 기립박수와 환호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올해는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공연을 하게 되어 기쁘다. 이번 공연으로 한국문화예술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세계에 알리고, 학생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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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선의 산수(傘壽)기념 창작춤 〈맥의 터〉전통과 창작 아우른 노장의 춤 한마당 7월 5일 밤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문화예술인들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원로들과 젊은이들까지 한여름 밤의 객석은 만원을 이루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최선 예능보유자의 산수(傘壽, 80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자들이 마련한 춤판은 전통춤판이 아니라 뜻밖의 창작춤 무대였다. 더구나 호남살풀이춤보존회(회장 장인숙) 회원들이 주최·주관한 공연이어서 당연히 제자들이 모든 스태프로 참여하는 스승에게 바치는 봉무(奉舞)무대 임에도 대본, 안무, 구성, 총감독이 80세를 넘긴 최선이어서, 처음엔 당사자의 욕심인가하고 의아 했었다. 작품내용은 어린 시절 춤에 입문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평생 춤만 추며 살아온 소재를 모티브로 만든 최선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대본과 안무, 총감독까지 하면서 ‘전북 춤맥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맥의 터’라는 제목까지 본인이 붙인 배경을 납득할 수 있었다. 최선은 3막으로 구성된 작품에 무려 6번에 걸쳐 출연하면서 전통춤과 창작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주역 무용수로서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몸놀림이 젊은이들 못지않았고 감정표현력, 연기력과 무대 장악력까지 뛰어나 관객을 압도하면서 마지막 장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적시며 흐느끼는 소리마저 간간이 들려왔다. 막이 오르고 최선의 춤인생 영상에 이어 첫 등장은 의외로 어린 아이(김찬우)가 한복 입은 어머니(김정자) 손에 이끌려 천천히 걸어 나와 무대 앞을 가로질러 허튼춤으로 한 바퀴 돌아 인계하듯이 인사하고 퇴장하는 장면이었다. 1943년 8살 때 춤추고 멋내기를 좋아하던 아들(최선)을 데리고 전라북도 전주에 최초로 현대무용과 발레를 도입한 무용가 김미화(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최승희 제자)의 연구소를 찾아가는 최선 어머니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예견하는 극적인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어 호남살풀이춤과 함께 지정된 동초수건춤을 최지원과 이수자들이 군무로 선보였다. 이 춤은 해방 후 전동성당 옆에서 전동권번에서 이추월로 부터 전수받은 전통춤이다. 이추월의 조선춤들이 오늘날 전북 특히 전주지역에 최선과 뒤를 이어 기방계 전통춤의 춤맥을 잇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장으로 구성된 2막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싹 티우고 꽃피워 열매 맺어 뿌리내린 민족의 한과 혼의 결정체인 전통춤의 정립과 전승과정을 그렸다. 1장은 ‘연가(戀歌)’와 부채입춤, 2장은 어린 시절의 아동춤과 엿장수의 가위춤, 3장은 대감놀이 무당춤과 무당군무, 4장은 특별한 창작무대로 깃발춤, 장대춤, 가면춤의 8인 군무에 이어 남성 4인의 한국창작춤과 최선의 합동춤이었다. 1장 연가는 최선이 1960년 초 개인발표회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던 작품으로 성춘향과 이도령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춤으로 당시 소녀 김광숙과 이길주와 함께 추던 춤이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최선과 장인숙의 듀엣으로 연가를 추었는데 최선의 노익장(老益壯)이 아닌 젊은 청춘남녀의 애틋한 분위기를 여전히 느끼게 하였다. 2장은 천진난만한 아동 유희와 엿장수와의 합동춤으로 최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였다. 3장 대감놀이 무당춤도 최선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다. 홍철릭(紅天翼)에 홍빗갓을 쓰고 오방기를 든 주무당 최선의 청신무 이어 조무들의 방울·부채춤 2인무와 최선의 재등장으로 3인무로 펼쳐진 도약과 회전의 접신무는 강렬한 강신의식을 보는 듯했다. 4장은 6.25 한국전쟁의 영상으로 전쟁과 폐허, 피난과 굶주림으로 처참했던 당시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이 춤으로 살아남는 강인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남성들만 출연하는 이스트기네스 비보이단의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깃발, 장대, 가면을 이용한 역동적인 몸짓으로 당시 남북의 이념 갈등구조 속에서 극대극의 사회상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최선은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춤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군무 속에서 독무로 오버랩(overlap)하며 고뇌에 찬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남성무용단이 펼치는 4인 창작군무 다음에 최선의 독무가 이어졌다. 중년기의 애환과 한을 극복하고 외길 춤 인생의 여정을 표현하는, 대각선 외줄 조명을 따라 긴 천을 즈려밟고 지나갔다 다시 나와 몸부림치다 등지고 뒷막을 향해 한손을 쳐들고 비척거리면서도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가는 장면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3막은 1장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영상아래 꽃길 따라 긴 수건춤, 어둠 속의 쌍등춤과 외등춤, 2장에 무대중앙에 높은 사각단 위의 백발노인(최선)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춤, 단아래의 수건춤 3인무, 남성4인무, 수건 든 비보잉(B-boying) 군무에 이어 다시 등단한 백발노인과 단아래 제자들과 함께 호남살풀이춤 군무로 마무리하였다. 하얀 수염과 상투머리, 도포를 입은 노인이 호리병을 들고 앉아서 술을 마시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뇌에 찬 신로심불로춤은 80세를 넘긴 회한의 춤이지만, 수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조선춤의 숨결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가는 신선(神仙)의 춤을 표현한 것이다. 이어 8명의 비보이들이 개량한복에 수건을 들고 추는 군무가 선보였다. 처음에 서서 추는 톱록(toprock), 바닥에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주로 발을 움직이는 다운록(downrock)과 다리를 벌린 채 어깨와 등을 이용해 회전하는 윈드밀(windmill), 짧은 시간차를 두고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가며 움직이는 스와이프(swipe)와 몸을 잠시 정지하는 프리즈(freezes) 등으로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사각현의 단 위에 오른 백발노인 최선(崔善)은 그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보유자이기에 이수자들과 함께 호남살풀이춤을 보여주면서 무선(舞仙)같은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 <곰삭고 가라앉히는 전통춤과 확산하고 뜨는 창작춤과는 성격이 달라 병행하기 쉽지 않는데 이번 공연은 창작춤의 면모와 감정표현과 연기력도 발휘하여 전통춤만 추는 편견을 불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80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를 주름잡고 6번씩이나 출연하여 주역 무용수로서 청년 같은 정신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무대였다. 옥에 티라면 두 가지 등춤이 유사하여 어둠 속에 신비감도 주었지만 10분 남짓 길게 추다 보니 지루했고, 창작무대라 하지만 순수 창작품이라기보다는 전통과 창작의 퓨전으로 전통춤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수기념 무대는 몇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개인무대라기보다 전북 전통춤계의 면면을 보여주는 자리였고, 그가 전북 무형문화재춤의 대가임을 확인시켜주는 무대였으며, 가장 오랜 세월 전북춤을 지켜온 지킴이임을 증명하는 공연이었다. 최선의 업적이라면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고(원광대 이길주, 광주대 허순선, 충남대 정은혜, 영남대 김희숙 등)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간문화재를 배출시킨 점이다. 현재 전북에서 김광숙(예기무), 이길주(호남산조춤), 문정근(전라삼현승무), 서울에서 고선아(한량무), 이북오도에서 김나현(화관무)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제자들이다. 이매방류 승무의 명인 채상묵도 어린 시절부터 춤이 바탕을 지도받은 수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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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고궁 공연 ‘덕수궁 야연’에서 아리랑국립국악원과 덕수궁관리소는 오는 10월 5일(목)부터 7일(토) 까지 매일 저녁 7시 고궁 공연 ‘덕수궁 야연(夜宴)’을 덕수궁 정관헌에서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가을로 접어드는 10월, 고즈넉한 고궁의 저녁에 어울릴 다양한 전통 국악으로 궁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고 분주한 도심의 시간 속, 삶의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했다. 총 6가지 공연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이번 공연은 우리 전통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양식으로 고종황제의 연유(宴遊) 장소로 지어진 ‘정관헌’을 무대로 펼쳐진다. 아정한 선율로 고궁의 멋을 더할 정악과 품격 있는 궁중정재를 비롯해 구성진 서도소리와 아리랑, 부채산조춤, 판소리 등을 선보인다. 정악으로는 ’물속의 용이 읊조린다.‘는 뜻을 가진 '수룡음'과 궁의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음악곡으로 조선후기 선비들이 즐기던 '영산회상'을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연주한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신라인들이 관창의 충성심과 넋을 기리기 위해 추었던 <검기무>와 가야금 산조와 부채춤이 어우러져 단아하면서도 격조 있는 춤사위의 <부채산조춤>을 선보여 정관헌 무대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예정이다. 민요와 판소리 무대도 이어진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은 판소리 심청가 중 심봉사가 맹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황성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담은 '황성올라가는 대목>'과 서울과 서도지방에서 산천 경치를 주제로 부르는 '산타령'과 한국의 한과 흥을 반영하는 대표적 민요 '아리랑'을 선보인다. 고궁 공연 ‘덕수궁 야연은’ 오는 10월 5일(목)부터 7일(토)까지 매일 저녁 7시 덕수궁 정관헌 무대에서 펼쳐지며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에서 9월 14일(목) 오후 2시부터 사전 선착순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덕수궁 입장료는 별도 지불해야 한다. 관람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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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집, 윷놀이 등 추석맞이 무형유산 무료 체험 운영문화재청은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9월 28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한국의집(서울 중구)에서 다가오는 민속명절 추석을 맞아 다채로운 무형유산 체험을 할 수 있는「지구촌 온 가족이 함께하는 추석 명절 큰잔치」행사를 개최한다.이번 행사는 지난해 11월 국가무형유산 공동체종목으로 지정된 ‘윷놀이’를 즐길 수 있는 윷놀이 대회와 국가무형유산 떡 만들기, 제다, 아리랑, 한복생활 등을 한자리에 모아 무형유산 체험·공연, 온라인 이벤트 등에 참여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먼저, ▲ 윷놀이 대회는 내국인(100명)과 외국인(60명) 참가자가 함께 참여해 예선전(OX퀴즈)을 거쳐 5단계의 승자 진출전(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최종 우승한 4팀을 비롯하여 당일 최고의 옷차림 약속(드레스 코드)을 선보인 참가자를 선정하여 다채로운 상품 시상도 예정되어 있다. 또한 행사 전·후로는 42년간 국내외에서 전통예술을 알려온 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의 행진(퍼레이드), 강강술래, 오북춤 등 아름다운 전통 춤과 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이외에도 ▲ ‘윷 점치기’, ‘윷놀이 빙고’, ‘윷 던져 넣기’, ‘윷신을 이겨라’ 등의 체험 공간이 마련된 상설체험장도 행사 시간 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 추석의 대표 전통음식 ‘송편 만들기’, 조개껍데기의 영롱한 빛이 아름다운 ‘나전보석함 만들기’, 한국 전통 차문화를 배워보는 ‘한국 차문화 체험’, 부채춤으로 꽃 만들기, 파도 타기 등의 동작을 익힐 수 있는 ‘부채춤 배워보기’까지 무형유산 4종목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참고로, ‘송편 만들기’와 ‘나전보석함 만들기’는 40명, ‘한국 차문화 체험’과 ‘부채춤 배워보기’는 20명이 참여 가능하다.온라인 문제 맞히기 행사도 진행된다. 9월 11일 오후 2시에 문화재청 사회관계망서비스(인스타그램, X(트위터)) 및 K-무형유산 동행(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게재되는 문제의 정답을 댓글로 남기면 추첨을 통해 각각 100명에게 윷놀이 꾸러미(세트)를 기념품으로 증정할 예정이다.행사 참가비는 무료이며, 윷놀이 대회와 무형유산 체험행사는 사전예약자에 한해 참여 가능하다. 국내 참가자의 경우 네이버 예약을 통해 9월 11일 오후 2시부터 최대 4인까지 선착순으로 예약가능하며, 주한외국인은 강남글로벌빌리지센터(https://www.gangnamglobal.com)를 통해 동일한 방법으로 예약 가능하다. 윷놀이 상설체험장은 행사 시간 내 방문하는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누리집(www.cha.go.kr),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을 참고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 전승기획팀(☎02-3011-2151~2), 강남글로벌빌리지센터(☎02-3423-7962)로 문의하면 된다.문화재청은 이번 행사를 통해 많은 국민과 외국인들이 우리 무형유산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누구나 쉽고 즐겁게 무형유산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적극행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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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 '천년의 소리, 천년의 몸짓'성황리 펼쳐지난 5일 오후 7시, 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되는 2023 아세안정상회의와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펼쳐진 전통예술 교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오프닝 무대로 인도네시아 LKB 사라스와티 가믈란(Sarawati Gambelan)팀 반주에 타리 스리카믈라위(Tari SriKamelawi) 민속춤을 시작으로 한국의 민속음악의 정수로 꼽는 아리랑연곡ㆍ심봉사 눈뜨는 대목,(소리), 태평무ㆍ부채춤(민속무용), 사물놀이(연희) 등을 선보였다. 2부에서는 양국 간의 합동무대로 케착(kecak) 등 총 120분간의 무대를 선보였다. 티켓오픈 하루만에 1,140여석이 전석 매진되어 객석을 가득 메웠다. 관람객 대부분은 젊은층 현지인이었으며, 공연 중간중간 얼씨구, 좋다, 예쁘다 등 추임새를 연발하며, 박수와 함께 열광적으로 호응하며 공연의 열기를 더했다. 특히 인도네시아 LKB 사라스와티 가믈란(Sarawati Gambelan) 반주팀에 맞춰 케착 민속춤과 한국의 민속무용, 사물놀이 등 양국 간 협연을 통해 양국 수교 50주년의 의의와 가치를 더하는 계기가 됐다. 공연 후 양국 무용단과 관객들이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행렬이 1시간 가량 이어졌으며, 한국 출연진과 스테프에게 악수와 사진 촬영을 요청해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의 높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김중현 원장은 "이번 교류공연을 계기로 ‘K-팝의 뿌리인 전통국악의 가치와 잠재력을 보았으며, 국가간 교류협력의 지렛대로서 문화의 영향력과 국악원, 재외 문화원 등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역할 확대의 필요성을 재확인 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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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천년의 소리 천년의 몸짓' 교류공연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2023 아세안 정상회의와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통예술 교류 공연을 펼친다. 이번 공연은 2023년 9월 5일(화) 오후 7시(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퓨트라 아트프레뉴어(Ciputra Artpreneur)공연홀에서 민속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기악합주, 부채춤, 태평무, 판소리, 사물놀이 등 60분간 선보일 예정이며,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공연팀 사라스와티(Saraswati)와 합동공연도 펼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주인도네시아 대한민국대사관이 주최하고,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과 국립민속국악원이 주관하고 있는 이번 공연은 대한민국의 민속예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춤인 케착(Kecak)과 한국의 민속무용이 교감하며 함께 펼치는 무대도 준비되어 있다. 이번 교류공연을 계기로 한국-인도네시아 간 전통예술콘텐츠 향유를 통해 문화공감 증진 및 교류 기회가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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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유럽연합 한국문화원, '판소리 워크숍' 인기벨기에에서 한국 전통 음악인 판소리를 직접 배울 수 있는 워크숍이 개최됐다고 주벨기에유럽연합 한국문화원이 26일(현지시간) 밝혔다.지난 21일부터 일주일간 전통음악 '판소리 워크숍'을 개최했다. 2017년 이후 매년 열리고 있는 '판소리 워크숍'에는 민혜성 명창이 강사로 참여, 30여 명 수강생에게 판소리를 소개했다.특히 올해는 현지 내 수요를 고려해 처음 판소리를 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초급반'과 매년 워크숍을 수강했던 학생들을 위한 '중급반'등 2개 반이 운영됐다.1주일간 매일 집중 강좌를 통해 참가자들은 '진도 아리랑'과 '농부가'등 남도 민요, 수궁가 중'범 내려온다'와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등 수궁가와 심청가의 눈대목을 배웠다. 소리꾼이 이야기에 따라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인'발림'과 관객이 흥을 돋구기 위해 하는'추임새' 등 판소리의 주요 요소들도 경험했다.26일에는 참가자들이 벨기에 한국문화원에서 발표회를 갖고 지인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동안 배운 판소리 공연을 선보였다. 한복을 입고 부채를 손에 쥔 채로 진지하게 민요와 판소리 대목을 부르는 참가자들에게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민혜성 명창도 판소리 한 대목을 들려줬다. 민혜성 명창은 "10년 전만 해도 현지인들에게 판소리는 영화 속 이국적인 음악이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많은 외국인이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소리꾼이 되어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문화원은 국립국악원과 협력해 2017년부터 매년 판소리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오는 9월에는 부채춤과 소고춤 워크숍을 진행한다. 벨기에 한국문화원은 판소리 외에도 장구, 판소리, 단소 등 연중 다양한 전통문화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부채춤과 소고춤 워크숍도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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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밀레니엄합창단 'Hola~ 아리랑''스페인밀레니엄이 들려주는 환상의 하모니 한국에 울려 퍼져'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음악을 레퍼토리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합창단’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민요와 가곡을 부르는 스페인 밀레니엄 합창단 공연이 24일 국립극장 해오름 공연장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스페인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은 공연 1부에서 ‘라바삐에스 이발사’ 등 스페인 가곡을, 2부에서 ‘청산에 살리라’ 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선보였다. 한국 전통 가락과 스페인의 감수성이 어우러진 공연에 관객들은 큰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며 합창단의 하모니를 만끽했다. 특히, 이어지는 관객들의 앵콜 요청에 합창단은 ‘영암아리랑’을 부르며 교감했다 스페인 밀레니엄 합창단은 60년 역사를 가진 스페인 국영방송국(RTVE)의 단체로 단장 겸 상임 지휘자인 임재식 지휘자가 창단했다. 스페인밀레니엄합창단(명예단장 전교육부장관 이돈희)은 60년의 역사를 가진 스페인 최고의 RTVE (스페인국영방송국) 합창단의 80명 단원 중 24명을 선발. 외국 프로 합창단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민요와 가곡을 부르는 팀으로 1999년 현 단장 겸 상임 지휘자인 임재식이 창단했다. 지휘자를 제외한 단원 모두가 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휘자의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민요와 가곡을 무대에 올리는 등 스페인의 국가적인 각종 축제 및 주요 연주회에 폭넓게 활동하며 스페인과 유럽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수준 높은 합창단으로 한국 가곡 및 민요 레파토리가 80여 곡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전역에 TV로 방영되는 정기연주회를 15차례 개최하는 등, 지휘자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스페인과 한국의 문화 교류에 가교역할과 민간 외교사절로서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 전 세계에 한국 음악을 전파하며 스페인과 한국의 문화 교류에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임재식 지휘자는 한국인 교포로 스페인에 우리 민요와 가곡의 아름다움을 알리며 ‘아리랑’이 스페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데 기여했다. 1부는 스페인 전통 음악 장르 사르수엘라(Zarzuela)로 구성하였다. 베사메 무쵸(Besame Mucho) 는 누구나 ㅇ는 노래라서 반가웠다. 스페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우리와 같는 반도의 나라, 투우, 플라멘꼬, 태양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정열의 메로디 악풍이었다. 특히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알칸타라(Alexandre Alcantara)의 유려하면서도 우아함이 돋보이는 터치와 스페인 전통 장단인 호타(Jota)에 늦가을의 찬 바람이 휘날리는 장중한 율동으로 전율을 일으키는 고혹한 가요풍의 선율을 선보였다. 이어 어린이 합창단과 부채춤의 YS공연예술단이 한국의 미를 선사하여 박수를 받았다. 2부에는 한국말로 부르는 우리 노래에서는 단원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자 찬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너'(Eres Tu)를 열창한 소프라노 솔리스트가 한복을 입고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서 환호성을 나오고 큰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날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을 인솔하여 온 사단법인 국제문화공연교류회 양평수 회장은 "합창단의 설립자인 임재식 단장의 집념에 감동을 받았다. 유럽에 우리 전통문화와 가곡를 널리 알리는 작업은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나 'K-팝'이 전파되기 전부터 스페인에 한국민요와 아리랑을 알리고 있다. 진정한 문화교류의 장을 열고 있다."라고 전헸다. 멀리 경기도 양주시에서 온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최미분(사할린 2세) 단장은 "우리 동포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아리랑을 언제나 부른다. 특히나 무대에서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아리랑으로 표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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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사할린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모국체험국립남도국악원의 해외동포 청소년 모국체험 연수는 2006년부터 매년 진행되어 오다가 코로나로 인해 3년만에 이루어졌다. 8월 7일부터 19일까지 연수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올해는 에스토니아 아리랑무용단, 우즈베키스탄 고려무용단, 카자흐스탄,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와 하늘팀 학생들이 찾아왔다. 올해 17년차 진행되어오는 사업으로 재외 한국문화원이나 한국교육원의 추천을 받은 입양아 및 해외동포 2·3·4세 그리고 한국음악에 관심 있는 해외동포와 관련된 외국인들에게 모국(한국) 전통문화 체험기회 제공을 통해 조국애와 민족문화의 공감대 형성하고 한국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한국 문화의 해외 홍보 및 한류 확산을 꾀할 목적으로 5개국에서 참가했다 러시아 사할린에 있는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가 코로나19로 인해 4년만에 진도에 있는 국립남도국악원에 신 율리아 교사의 인솔을 받으며 2주 동안 한국의 전통예술을 배우러 왔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는 사할린주와 각 도시, 러시아, 한국 등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해 많은 상을 받았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1회 러시아 극동지역 국제포럼과 제15회 러시아 민족문화대회에서 각각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에트노스예술학교는 '러시아 연방 톱 50 예술학교'에 선정됐다. 최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의 '불꽃놀이'타악기 팀(신 율리아 지도교사)이 '러시아 대학생 봄'축제 악기연주 부문에서 '환상'이란 모듬북 컴포지션으로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했다.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한틔만시이스크에서 6월 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가운데 전국에서 지역예선을 거쳐 우승한 참가자 2000여 명이 이 대규모 행사에서 경연을 벌린다. '불꽃놀이'팀은 대상뿐 아니라 제3회 재능있는 청소년 지원 국가상도 받았다. 사할린 에트노스예술학교 한국전통예술학과는 한인 3∼4세들의 자랑이고,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워준 큰 배움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한국국악협회 진도군 지회 이희춘('진도북춤' 예능보유자)지회장은 15일 광복절 날 기념하여 사할린에서 온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와 하늘팀 학생들에게 진도의 자랑 소치 선생의 그림이 박혀있는 티셔츠를 선물로 전달했다. 국립남도국악원은 2016년부터 '해외 동포 및 국악단체 초청연수(3월~10월, 8회 진행 예정)' 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포 및 국악단체는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올해 6차가 되는 '2023 해외 동포 및 국악단체 초청연수'는 3월부터 10월까지 8회 정도 매회 약 2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참가단체가 원하는 전통예술 과목(사물놀이, 부채춤, 민요, 판소리, 가야금, 대금 등)을 국립남도국악원의 단원들이 지도하며 마지막 날에는 발표회도 하게 된다. 또한, 이와 함께 공연 관람, 국악 강의, 문화탐방 등도 함께 제공한다.해외 현지 관련 기관의 추천서와 함께 신청서(10명~20명)를 제출하면 되고, 항공료를 제외한 모든 비용은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부담한다.신청 관련 안내는 국립남도국악원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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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전통춤 계승과 발전방향문화론적 시각과 미래 방안 1. 전통춤 패러다임과 계승 문제의 접근방법 문화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면서 변천한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형성되며 춤의 양상(樣相)과 양태(樣態)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모(變貌)한다.서양춤의 변모는 고대의 의식적(儀式的)인 리투얼 댄스(Ritual Dance)로부터 중세 포크댄스(folk dance)와 코트댄스(court dance), 절제와 균형의 합일을 강조하는 18세기 클래식 발레(Classical Ballet), 꿈과 이상의 도약을 향한 19세기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의 주관적인 형식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된 모던 댄스(Modern Dance)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춤 역시 고대의 제천의식춤(祭天儀式舞), 중세의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민속춤(民俗舞), 근세의 궁중춤(宮中舞), 민속춤(民俗舞),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현대의 전통춤(傳統舞), 창작춤(創作舞), 외래춤(外來舞) 등 각 시대별로 주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 존재해 왔으며, 또 각 시대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근대이전 시대의 전통양식을 갖춘 춤들을 통틀어 ‘전통춤’이라고 하고 근대 이후에 유입된 발레와 모던댄스를 ‘외래춤(외국춤)’으로 구분한다. ‘한국춤’은 협의로 전통춤과 한국창작춤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광의로 한국에서 한국인이 추는 외래춤까지도 포괄하기도 한다. 명칭도 한때는 ‘신무용’, ‘고전무용’, ‘한국무용’, ‘민속무용’, ‘전통무용’ 등으로 두서없이 부르기도 하였고, ‘무용’과 ‘춤’도 혼용하여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근대는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든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고 변화양상을 보이면서 1902년 협률사의 등장으로 과거에 궁중과 기방 등에서 추던 춤들이 최초로 극장공간과 공연문화가 태동하면서 극장춤으로 시도되었다. 외국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는 발레와 현대춤이 자리 잡아 가면서 전통춤과 창작한국춤과 함께 한국춤계를 주도하며 저변을 확대해갔다.이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의 계승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계승문제를 접근하고 미래 발전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전통춤 계승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 중에서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기하여 계승문제를 파악하기로 한다.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2. 전통춤 현황과 접근배경 1) 전통춤 종류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현황 한국의 전통춤도 시대변천에 따라 부침(浮沈)을 계속하면서 현대까지 전승되었다. 이상은 전통춤 분류와 몇몇 종목의 예시일 뿐이고 근현대로 전승한 궁중춤 50여종, 무당들의 무구춤 300여종, 재인청춤(화성 50여종, 안성향당춤 40여종)과 전통예인들이 전승한 춤(한성준 80여종, 김인호 30여종, 김덕명 20여종) 등등 정병호 정리 370여종을 포함한 필자 조사 1000여종의 전승춤 등 수없이 많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강강술래(8호, 소리춤), 진주검무(12호), 승무(27호), 승전무(21호), 처용무(39호), 학연화대 합설무(40호), 태평무(92호), 살풀이춤(97호) 등 8종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한량무(서울45호), 살풀이춤(서울46호), 동래학춤(부산3호), 동래고무(부산10호), 동래한량춤(부산14호), 승무·살풀이춤(경기8호), 안성향당무(경기34호), 고깔소고춤(경기56호), 승무(대전15호), 입춤(대전21호), 살풀이춤(대전20호), 승무(충남27호), 살풀이춤(대구9호), 호남살풀이춤(전북15호), 한량춤(전북44호), 호남산조춤(전북47호), 예기무(전북48호), 진주한량무(경남3호), 진주포구락(경남12호), 진주교방굿거리춤(경남21호), 범패와 작법무(인천10호), 날뫼북춤(대구2호), 수건춤(18호), 진도북춤(전남18호), 화관무(황해4호), 평양검무(펑남1호), 부채춤(평남3호) 등 27종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동북3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춤 중에도 많은 춤종목이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즉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족농악무(象帽舞、乞粒舞)를 비롯하여 길림성의 조선족아박무(牙拍舞, 안도현), 조선족부채춤(연변주), 조선족칼춤(도문시), 조선족원고무(도문시), 조선족학춤(안도현), 조선족접시춤(훈춘시), 조선족장고무(도문시), 조선족손북춤(手鼓舞, 도문시), 조선족방치춤(棒槌舞, 도문시), 조선족상모춤(연변주, 국가급), 조선족삼노인(화룡시), 조선족탈춤(도문시), 조선족칼춤(연변주), 조선족찰떡춤(떡메춤 打糕舞, 연변주), 요녕성의 조선족농악무(农乐舞, 乞粒舞, 본계), 조선족탈춤(철령), 흑룡강성의 조선족접시춤(碟子舞, 감남현), 조선족물동이춤(顶水舞, 목단강시), 조선족아박무(牙拍舞, 해림시) 등 20여종이 지정되어 있다(2012년 목록). 2) 전통춤 계승문제의 접근배경전통춤 계승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 <문화의 5대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3대 시각>에서 전통춤의 계승문제를 분석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문화(culture)’는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 5대 특성(속성)을 가진다.① 학습성(후천성): 인간의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② 공유성: 인간은 서로 공통된 행동과 생활양식, 즉 서로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③ 축적성: 문화는 서로 발달하고 상호작용하며 축적되면서 진보하게 된다.④ 변동성(다양성): 축적되는 문화를 통해서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동하여 발전한다.⑤ 전체성(통합성): 문화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통합성을 지닌다. 또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시각에는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또는 cultural relativism)’ 그리고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이 있다(한상복 외, l985). ①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문화는 생활양식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법률, 가족, 친족, 종교, 예술, 관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가 사고방식, 생산양식, 인간관계, 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문화와 관련된 많은 항목들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설명해야 의미관련(relevance)을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승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 추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는데 흔히 춤사위와 계보 수준에서 머물면 그 춤의 총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이 춤동작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cultural relativism)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과 그 민족의 생활사(life history)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타문화를 함부로 평가 비하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각기 역사와 가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자민족중심주의(문화국수주의, ethnocentrism)’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아무리 미개민족의 하찮은 민속춤이라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발레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자기 민족춤은 우수하고 타민족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동안 근현대기를 지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우월하게 놓거나 비하하는 수많은 사례를 겪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춤에서도 한국과 여타 아시아국의 춤에 대해 비교우위나 비하의식이 남아있고, 무형문화재 지정춤과 비지정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추종과 외면현상으로 수많은 춤들이 소멸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흔히 궁중춤은 품격이 있고 민간춤은 저급하다는 시각과 문화재 지정춤은 우수하고 비지정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은 그릇된 태도이며 다같이 소중한 한국전통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비교론적 시각은 두 지역 이상의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유사성 또는 공통점과 상이성을 명확히 규명하여 ‘보편화(普遍化, generalization)’하고 ‘특정화(特定化, specification)’하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일반화(一般化)’하는 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영숙살풀이춤(재인계, 서울중부지역)과 이매방살풀이춤(기방계, 호남지역), 김숙자살풀이춤(신당계, 경기남부지역) 등의 보편성과 일반성, 지역성, 공통성, 상이성 등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전통춤 계승의 문제점 1)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춤은 이러한 특성에 맞게 잘 전승하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통춤 계승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 –정책과 여과능력 부재 국권마저 상실했던 근대시기에 아무런 대응과 여과 없이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이 유입되었다. 1926년 이시이바꾸(石井漠)을 통해 서구 현대무용이 유입되었고, 최승희, 조택원들이 제자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한국무용계를 주도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유럽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이 유입되어 한국무용계에는 한국무용(전통춤 포함), 현대무용, 발레의 삼분법으로 대학무용학과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 열등주의와 사대주의 19세기말 갑오경장(1894)으로 구시대적 문물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개혁을 기점으로 근대화는 점차적으로 정착되어갔으며, 한편에서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사정을 반영한 측면을 중시하였고 그것은 민족적 자각의 발로가 되어 민족주의가 발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문화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힘입어 ‘신무용’이 ‘예술’로 인정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통시대의 춤을 ‘비예술(非藝術)’로 기녀나 무당이나 민간인들이 추는 낡고 촌스런 문화로 무시하는 경향도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식이 깨어나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민족자각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였고, 신무용에 대응하는 전통춤을 발굴하고 무대화하는 노력도 미약하나 발현되기도 하였다. 1902년 협률사와 1907년 광무대 등에서 재인청출신 김인호와 뒤를 이은 한성준 등이 전통춤의 무대화를 위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정립하였다. 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원형전수와 폐쇄적 교육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도제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분야 역시 스승의 독창적 비법을 전수받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똑똑한 제자들은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문화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원형전수’라는 미명하에 스승의 기법을 한 치라도 변화시키면 위법이라고 하여 문화의 발전지체 현상 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매방 승무와 살풀이춤을 순서 하나라도 틀리면 큰 죄를 짓는 국가문화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창조적 계승의 원천봉쇄 해방 후에는 더 개방적이어서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외래문화가 직수입되어 이전보다 수용과 대응문제에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 왔다.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법률 제961호)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에 안주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지내왔지만 지정되지 못한 수많은 전통춤들은 반대로 더 소외되고 인멸되는 비극을 잉태하였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무형문화재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 일방적 전수만이 지속되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변화해가는 현대문화와 세계화에 더욱더 멀어지고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편식과 전통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다. 2) 제도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① 무형문화재 제도 지정당시의 문제-전통문화의 소멸위기-국가관리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 국제정세의 서세동점(西勢東占)과 근현대화로 인한 ‘전통문화유산의 소멸위기’를 극복하려는 시급성 때문이었다. ② 무형문화재 제도 현재의 문제-‘원형’보존의 박제화-‘전형’ 개념도입현재는 ‘문화원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전승과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문화원형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다. 원형(原形)과 원형(原型)은 있긴 있으나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의 속성은 원형질(原形質)은 있으나 형태(形態)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형(無形)문화재인 것이다. 문화원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변화된 형태를 남기면서 ‘성장(成長)하는 생명체(生命體)’와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시형(時形) 또는 시형(時型)’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지정문화재의 무관심과 소외현상도 심화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으며, 지정종목도 ‘원형전승’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퇴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2015년 다시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원형(原形)’논리에서 ‘전형(典型)’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박제화 되었던 무형문화재의 발전변모의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운영기준과 연계한 법안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문화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정적인 문화환경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 서구문명의 범람과 현대화 과정에서 동적인 문화변동에 대처능력도 미흡했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제식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수받아온 장인정신은 변화를 부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수동적인 전승에 안주하여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일각의 전승 성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4. 전통춤의 미래 발전 방향 1) 전통춤에 대한 문화론적 발전 방향① 문화에 대한 3대 시각인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을 견지해야 한다. 특히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으로 1000여종에 이르는 비지정 춤에 대한 관심과 전승에 지정춤과 동격으로 전승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 무대화, 전승력을 키워야 한다. ② 문화의 5대 특성인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의 입장에서 발전시킨다. 특히 변동성(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는 ‘원형’보다는 ‘전형’의 개념으로 발전적인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전형개념에는 ‘원형’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최초 전수 당시의 춤을 기본으로 간직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발전적인 노역을 경주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 전승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축적성이며 역사성이 되어간다. 2) 전통춤에 대한 원론적 발전 방향 ① 삼원적(三元的) 전승방향 국제로 시야를 넓혀 한국과 가까이는 한중일, 그리고 세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삼원적(三元的)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춤을 원형대로 지켜나가는 일(원형적 전승), 전통춤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일(발전적 전승),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고 가까워지는 현대사회에 세계춤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춤을 창조해 나가는 일(창조적 전승)이다. ② 세계화 방향 지금까지 전통문화는 「토착화」에 주력했다면 이후는 세계적인 「보편화」가 과제이다. 소멸되던 전통춤은 일차적으로 한국화(韓國化)작업이었다. 글로벌시대에는 세계화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주체성이 ‘국내적’(한국문화, 한국춤)이라면 세계성은 ‘국제적’(국제문화, 국제춤)이다. 주체성이 자기를 지키는 ‘보수’라면 세계성은 자문화와는 별개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이다. 또 문화논리로 보면 주체성은 ‘전통성, 수구성, 독창성’이고 세계성은 ‘외래성, 통합성, 전파성’에 비유된다. 즉 주체성(국내문화)과 세계성(국제문화)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두 명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상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수입이 문화수출보다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여태 밑지며 살아왔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지 우리문화를 세계시장에 내세우는 노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한류문화, K-culture’(K-pop, 한국음식, 화장품, 드라마 등)가 세계무대에 전파되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전통춤이 국내적으로 스포츠댄스, 힙합 등에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류춤, K-dance’로서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③ 대한민국시대 신전통춤의 창조 노력 5천년의 한국 문화사에서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자기문화를 살펴보면 선사시대 토기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기로 창조하여 찬란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춤도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창조되고 전승되었다. 근세말 효명세자는 20종의 궁중춤을 창조했다. 김인호와 한성준은 100여종의 전통춤을 정립하여 전승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무용가들은 대한민국시대 전통춤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나 근대의 과거춤에 매달려 미래춤을 창조하는데 소홀히 했다. 우리보다 북한은 전통춤은 무시했지만 민족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민속춤을 부단히 창출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전통고수에 매달리는 동안 북한은 재창조에 매달렸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전통춤, 재창조춤 등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백봉 부채춤은 세계무대에서는 한국민속춤으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신전통춤들이 쏟아져 나와야 미래국가시대가 도래했을 때 대한민국시대에 찬란한 전통춤들이 창조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문화(춤)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력(전승력)을 지니고 진화하며 오랜 동안 전승하게 되는데 문화의 속성에서 벗어나면 소멸된다.”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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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5일 토요상설 '국악의 향연'국립남도국악원(원장:김중현)은 5일 오후 3시 대극장 진악당에서 가무악 종합공연 '국악의 향연'을 선보인다. 먼저 한갑득 명인의 거문고산조 가락을 주제로 한 한갑득류 거문고산조에 의한 산조합주를 시작으로 젊은 청춘이 늙어감을 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단가 '편시춘'이 이어진다. 힘든 고난을 겪으며 맹인잔치에 가던 심봉사가 물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심청가 중 '심봉사 좋아라고' 대목이 가야금병창으로 흥을 돋운다. '되돌아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대금중주 '도드리'에 이어 맹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심봉사의 여정을 그린 판소리 대목으로 심청가 중 '황성 올라가는 대목'이 울려 퍼진다. 김백봉 명무에 의해 창작된 부채춤, 김소희 명창이 구성한 남도 뱃노래, 삼도설장구가 대미를 장식한다. 남도국악원 관계자는 2일 "남도국악원은 다양한 공연과 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번 남도의 흥과 신명을 느껴볼 수 있는 국악연주단의 국악의 향연을 통해 올여름은 '문화'로 몸보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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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박물관, 부채춤을 중국춤으로 표기홍콩 고궁박물관이 한국의 부채춤을 중국 춤으로 표기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 교수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5월말 홍콩 고궁박물관에서 SNS에 올린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고자 항의 메일을 보냈다”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무용을 중국 무용으로 소개하는 건 문화침탈 행위다'라며 '빨리 내용을 수정하거나 혹은 삭제해 외국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밝혔다.그는 "홍콩 고궁박물관에서 올린 피드에는 한복을 차려 입고 부채춤을 추는 장면을 사진으로 올리면서 ‘Chinese Dance’로 소개를 하고 있다. 부채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민속무용 중 하나인데, 이젠 부채춤까지 중국 문화라고 알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항의 메일에서 그는 "홍콩을 대표하는 박물관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무용을 중국 무용으로 소개하는 건 문화침탈 행위”라며 "어서 빨리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해 외국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서 교수는 "한복, 김치, 아리랑, 판소리 등에 이어 이젠 부채춤까지 중국의 ‘문화공정’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우리는 그들의 문화침탈을 제대로 지적하여 올바로 수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 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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